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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호(柳寬浩)

YooGwanHo

미디어아트 판화 색체연구 컴퓨터 페인팅 음악(테너)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 . .

1950년대의 동숭동 서울대 캠퍼스는 가난했지만, 순수한 낭만과 정서가 충만했다.
특히, 가을 문리대 본관에 있는 '마로니에' 나무는 짙은 가을의 풍미를 절정에 이르게 했다.
'문리대'와 '미술대' 사이에는 구름다리가 있어서 항시 학생들이 오고 가며 정서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서울대. 문리대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미술교육의 시발점을 만들었다. 그 당시 전국에서 모여든 타고난 인재들이 좁은 관문을 뚫고 입학했고, 마치 모두가 숙명적으로 예술가가 되겠다는 것처럼 예술혼에 빠져 있었다.
사실 지금에와서 보면, 이들의 바람이 모두 이루어진 듯 보인다. 실제로 그 당시 재학했던 선후배들 중 많은 이들이 분야별로 한국을 대표하는 대표적 미술인들이 되었음을 볼 수 있다.

서울대 문리대 전경

1956년에 입학해서 1960년도에 졸업 했으며, 서울고를 졸업하고 동기생 3명이 함께 입학했으며, 3명 중 1명은 '서양학과'에 , 2명은 모두 '응용미술학과'에 입학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디자인'이란 용어가 널리 인식되어 있지 못하였고, 학교에서조차도 그 의미를 명확하게 해석할 수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 애매모호한 이 용어에 어리둥절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Applied Art' (응용미술)이란 용어의 모호함과 교수들의 시대의식의 부족으로 교육내용들이 모두가 뒤떨어진, 방향감각이 없는 내용들인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본인은 학교수업에 실말하여 거의 학교수업을 받지 않았고, 독학의 길로 깊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독서를 많이 하기 시작했고 그 시절에 읽은 원서 중 'Hebert Read'"Philosophy of Modern Art" (현대 미술의 철학)는 많은 영향을 주었다.
야간에는 안국동(현 동덕 미술관)에 있었던 이봉상(안국동 화실)화실에 매일 나가서 회화에 몰두했었다.
이 화실은 국내 최초의 사실 미술학교나 마찬가지였고, 그 당시 많은 화가들과 지망생들이 모두 모여서 작품제작을 하였고, 훗날 한국을 대표하는 만은 화가들이 이곳에서 실제 배출되었다. 작품 표현의 기초 바탕이 모두 이곳에서 만들어졌다. 본인은 마마도 "시각적 감성"에 못지않게 "청각적 감성"(Auditory Sense)이 선천적으로 민감했었던 듯 싶다. 모계의 혈통에서 목소리의 유전자가 전해진듯하다. "성악"에 깊이 빠져 들기 시작하면서 많은 에너지를 그곳에 쏟았다. 마치 장차 "성악가"가 되어 "오페라 무대"에 서야겠다고 다짐했었다. 거의 독학으로 훈련을 하여 어려운 오페라곡들까지 자유로히 불렀기 때문에 서울대 음악제(그당시 매년가을 물리대 강당에서 개최되었음)에 자주 출현했었다.

대학졸업 후 모두들(동기생) 좋은 직장에 들어가서 좋은 대우들을 받았지만, 본인은 노래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후리렌서"로만 생활비를 벌었고, 실제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였다.
그러다가 공식적으로 자유로운 직장 생활을 처음 하게 되었던 곳이 공교롭게도 전공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언론기관(전, 동화통신사)이였다.
그곳에서 그 당시 국내 유일의 "화보잡지(life와 동일)인 동화 그라프의 편집디자인을 하기 시작했다. 이 직장은 모든면에서 본인의 의식세계에 전환점을 만들어 주었던 곳이다.
그 당시 이 회사는 국내 최고의 언론기관으로 젊은 엘리트 들의 집단이었고 해외 최대의 통신사 "AP,UPI"의 한국지국이 함께 일을 했던 곳이였기 때문에 모든 언론인들의 선망의 대상이였다.
이곳에서 나는 그동안 목말랐던 정신적 갈증을 풀 수 있었고, 정의로운 집단의 힘에 의지할 수 있는 안도감을 느꼈으며, 또한 정신적으로 훨씬 진화된 문화계 소식들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에 국내의 어떤 예술인(미술계)들 보다 앞선 표현세계를 눈으로 접할 수 있었다.
한가지 예를들면 1970년대의 서구의 미술운동소식중 "백남준"FLUXUS운동 퍼포먼스(행위예술)등을 직접 전송사진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당시 국내 유명 일간지에 이 소식들을 요약하여 사진과 함께 보도를 위해 보냈었지만, 어느 신문도 이 소식들을 보도한 신문은 없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신문사 문화부에 이들 내용을 소화하여 기사를 쓸 수 있는 미술 전문 기자가 없었기 때문이였다.

1977년 국내에서는 최초로 "GRAPHIC ILLSTRATION"전을 개인전으로 열었다.

[일러스트레이션]이란 용어가 미술계에선 매우 생소했던 국내에 그 정의를 알려주고, 순수회화 와의 쟝르의 연계성을 정의 하고자 했다. 그 이유는 그 즈음 대학에 출강하면 서 교과내용의 혼란스러움과 부실함을 메우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는 가운데 그 일부 였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공식적인 직업을 갖게 되었던 곳은 "디자인 포장센터" (KIDP)의 디자인 연구원 생활이였다.
이화동 서울대 미대가 있었던 자리에 군사정권 시절 박정희 대통령의 아이디어로 세워진 이곳은 명실공히 대한민국 디자인 분야의 산실 역활을 했따. 시각디자인실 과장을 거쳐 출판 디자인 실장에 올라 국내 최초의 디자인 잡지 "월간디자인"을 창간하고 많은 연구 프로젝트를 이끌고 우리나라 디자인 역사에 남을 수 있는 연구등을 남겼다. 이 기간동안 또 한 많은 변화와 일깨움이 있었다. 그 당시 이곳의 최고경영자는 모두가 군인(장성)출신들이였으며, 미술과 디자인과는 거리가 먼 단순한 관리자들이였다.

그러나, 내가 제직했던 시기에는 공교롭게도 장성출신중에서 가장높은 지성을 갖추었다고 자부하는 육군사관학교 교장출신의 김희덕 장군이였다. 군사영어사진을 편찬했던 그는 외국어 특히 영어에 능통해 있었다. 이분은 실제로 대한민국 디자인 역사를 다시쓰게 만든 분이였다고 평가하고 싶다. 디자인(DESIGN)이란 용어의 어원을 찾아내어 그 정의를 새롭게 한 분이였다.
그 당시, 이를 위해 그는 서울대를 비롯하여 전국 유명 대학 담당교수들을 디자인 센터 대 회의실로 출석하게 하여 자신이 연구한 내용들을 발표하게 되었다.

많은 교수들이 그의 강의에 자극을 받아 모호했던 디자인 이란 용어의 정의를 다시 정확하게 알게 되었고 부끄럽게도 비 전문가에 의한 일깨움을 우리 디자인 역사의 한 페이지로 남았다.

이곳에서 5년을 근무했고, 1981년 인하대 사범대 미술교육과 교수로 임용되어 교직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1982년 제 2회 개인전을 뉴욕소재 "HANGOOK GALLERY"에서 판화작품들로만 가지고 개최했다. 그 당시 미술평론가 김윤수 교수 이 전시회에 부쳐 다음과 같은 평을 썼다.

유관호 뉴욕展

유관호씨가 전공한 분야는 그라픽 디자인이며 그것을 그는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으나 그의 본령은 판화이다. 오래전부터 판화가들의 그룹전에 출품하고 있고 개인전도 몇차례 열어 주목을 받았던 만큼 그는 그라픽 디자인의 교수로서 보다는 판화가로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판화의 여러가지 형식과 기법 이를테면 목판화, 석판화, 실크스크린 그리고 심지어 인쇄기술까지 두루 마스터하고 있따. 어쩌면 그의 활달한 성격과 는 걸맞지 않을 만큼 섬세하고 치밀한 기법을 자유로이 구사하고 있는데 그 점에서 그는 한국에서 드물게 보는 테크니션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그러난 면모는 두차례의 작품전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판화는 드로잉이나 유화와는 달리 간접적인 방법에 의한 예술이므로 재료의 과정과 기법에 대한 숙련은 더 없이 중요하다. 이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음으로 그는 그것을 열심히 익혔으며 그러면서 한편 판화가 예술이기 위해서는 그것만이 아니라는 것도 알기 때문에 거장들의 작품을 다각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해 왔다.

그리하여 마침내 기법적인 것에서 예술적인 것에 장식적이고 미묘한 효과보다는 판화 특유의 표현상을 추구하고 시각적 의미의 커뮤니케이션을 높이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성과가 최근작품에서 두으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형의 단순화, 공간 혹은 면의 충실성, 색채의 강력한 표현등이 그러하다. 따라서 이들 작품은 마티스나 한스 아르프의 판화에서 보는 저 명쾌함과 충실함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그의 형은 마티스나 아르프의 그것과는 다른 날카로움과 강력함을 지니고 있다. 이를 위해 그는 윤곽을 붓으로 그리지 않고 필름판을 면도날로 직접 자르는 방식을 취하기도 한다.

한편 최근작에서는 그전의 정적이고 서정적인 것 대신에 다이내미즘이 강조되고 있다. 그것은 마치 금관악기의 소리나 질주하는 자동차의 속력, 도시의 원색적인 활력과도 같다. 이러한 것을 보면서 나는 그의 노래소리를 머리에 떠올린다.

다실 그는 테너가수이기도 하다. 아마추어가 아니라 독창회까지 가졌으며 음악가들로 부터 풍부하고 충실하고 힘찬 목소리, 원숙한 창법을 구사하는 테너가수라는 평가까지받았었다. 그같은 음악의 세계가 그같은 기질이 이제 작품속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요컨데 이 작가는 도시적 감수성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민감하고 명쾌하고 다이나믹한 것을 즐기는.....날카로운 윤곽선, 충실한 형태, 명쾌한 색면대비, 나이나믹한 표현이 모든 것에서 그것을 본다. 그 때문에 그가 취하는 주제나 모티브가 한국적인 것일지라도 그 감각과 표현성을 차라리 국제적이고 현대적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서구인들에게 더 어필하지 않을까 한다. 유관호씨의 뉴욕전에 대한 그곳의 반응과 평가가 기대된다.

1984년 제3회 개인전을 서울소재 "석화랑"에서 초대전으로 개최했다.

본격적으로 교직생활이 시작되면서 부터, 시각 표현세계의 기초이론(FOUNDATION COURSE)을 정립하기 위한 일에 빠지기 시작햇다. 왜냐하면 그때까지도 미술 디자인 교육예에 기초이론 서적들이

별로 없었고, 연구하고자 하는 연구자(교수를 포함)가 거의 없었다. 모두가 실기교육에만 치중했기 때문이다.

1984년 국내에선 첫번째로 색채 표현의 기초이론서인 [색채이론과 실제]를 내 놓았다. 이 저서는 대부분의 대학에서 기초 이론서로 채택되어 오랫동안 많은 미술학도들의 색채이론 공부에 도움을 주었다.

1990년 두번째의 저서도 [색채 디자인의 원리]를 내어 놓았다. 이 책은 홍콩대학의 우시우스 옹(WUCIUS WONG)의 원저를 편역하여 편찬했던 저서다.

1988년 제 4회 개인전을 [현대갤러리]에서 열었다

1991년 [KBS]방송숙 문화원의 요청으로 방송국내에 [한국색채 연구소]를 최초로 설립하게 되었고 이곳의 요청으로 색채 연구소 '전문위원'으로 2년간 근무하게 되었다. 이 기간동안에 [대한민국 표준 표색계]제작에 착수하였고, 교육용 영상재료, [색의 이해]를 제작하여 EBS교육방송에서 교육용 프로그램으로 이용하도록 만들었다.

1992년 [한국표준표색계]의 도집이 탄생했다

1992년 본인의 5번째 개인전이 [롯데백화점 창립 13주년 기념 특별기획전]으로 초대되어 열리게 되었다. 이 기획전을 평소 색채 연구를 통해 미술의 표현세계(지각세계)의 진화과정을 꿰뚫어보게 되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표현 미디어에 관심이 많언차에 일본의 동경소재 동양미술학교 (일본 내에서 제일오래된 미술학교)의 컴퓨터 실에서 오랜기간 '디지털 미디어'에 빠지게 되었고 그 시기 이학교의 컴퓨터 실에는 일본에서 최초로 첨단 컴퓨터 "PAINT BOXHD"(영국의 QUAUTEL에서 개발한)를 도입하여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게 했던 것으로 이 첨단도구를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표현도구로 이용하여 작품을 제작햇다. 매월 주말마다 일본의 이 학교 컴퓨터실을 찾아 이학교의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롯데 미술관의 특별 초청으로 이루어졌던 이 전시의 공식 명칭은 "컴퓨페인팅(COMPUTER PAINTING)전이라고 불렀고 국내 화단에 커다란 새로운 멧세지를 주게 되었다. 그 당시 이 특별전시회에 부쳐 미술사가 김홍의(현 서울시립 미술관 관장)씨는 다음과 같이 평을 썼다.

1995년 디지털시대의 도래에 따라 디지털 미디어에 몰두함으로써 많은 디지털 미디어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당시 대 기업이였던 벽산구룹의 후원으로 이 회사가 설립한 미술관 [ART BEAM]의 대 전시관에서  초대전을 갖게 되었다. 이 전시회 명칭은 [TECHNO ART]전이라

불렀고, 이 전시는 우리 미술계에 많은 충격을 주었으며, 표현 세계의 지각적인 확산을 의미하는 멧세지를 주게 되었다.

1996년,

3번째 저서 [디지털 색채론] - 세진사 출간 되었음.  이 저서는 [아나로그의 색]을 넘어서 [디지털의 색]으로의 관심을 유도하게 만드는 계기를 주기위해 집필되었다.

2002년,

서울시립 미술관 주최 [2002년 미디어 비엔날레]에 초대작가로 [2002DIGITAL FOREST]란 제목의 입체 설치 작업 전시다. 5감을 동시에 건드리는 설치작업으로 일본의 세계적인 환경음악가 [TAKASMI KOKUBO]와의 공동작업으로 제작되었다.

2007년 6번째의 저서, 색의 정신세계(THE SPIRIE OF COLOR)출간

2008년 첫번째 개인 독집 앨범 -"YOO GWAN HO, TENORS FAVORITE SONGS" 제작

2010년 두번째 개인 독집 앨범 "TENORS FAVORITE SONGS" 제작

이번 전시회는 지난 30년동안 제자들과 같이 해온 세월을 더음어 보고자 계획한 것입니다.

전시회 자체로서의 의미는 없기 때문에 부끄럽고 잊어 버리고 싶은 옛 작품등이었지만 마음 내키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준비한 것입니다.

과거 어려운 우리의 미술계와 디자인계 풍토속에서 '장르'라는 벽에 부닥쳐 오랜세월 어렵게 생존을 위한 안간힘을 다해 보았지만, 항상 좌절만 느껴 왔습니다. 그 동안 학교 생활을 통해 그나마 위안을 가졌던 점은 제자들과 함께 노력하고 공부했던 시간들이였고, 실제로 이러한 시간들이 나의 작품 제작에 새롭고 신선한 의욕을 돋구어 주었던 것입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학교 강사 생활을 시작하면서  처음 내 자신이 주어진 틀 속에 갖히면서 '장르'의 올가미에 걸려든것을 실감했습니다.

미술대학, 응용미술과를 나와 생존을 위한 직업을 가지면서 상황은 더욱 어렵게 되었고, 또한 나의 작품 생활에 치명적인 혼란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다행스러웠던 점은 "색채이론"을 공부하게 되면서 표현의 진화 과정을 대가들의 작품 세계를 통해 꿰뚫어 보기 시작했고, 단순히 이론적 개념을 통한것이 아닌 내면의 표현 철학을 이해 할 수 있었던 일입니다.

즉, 표현 미술은 '순수미술'이든 '디자인'이든 또는 '건축'이든 하나의 틀에서 시작해야 한다는 느낌이였고, 각자의 '장르'가 이러한 하나의 틀 속에서 '방법론'에 따라  각 분야의 전문화가 이루어 저야만 된다는 생각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나의 생각이 많은 '디자이너'나 '미술인'들에게서 반론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1977년 첫번째 개인전으로서 'GRAPHIC ILLUST'전을 안국동에 있었떤 태인화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