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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호(柳寬浩)

YooGwanHo

미디어아트 판화 색체연구 컴퓨터 페인팅 음악(테너)

유관호 비평(Critic)

첨단 매체와 전통적 추상미학의 결합

유관호(GwanHo Yoo)는 컴퓨터로 그림을 그린다. 그것도 최첨단 컴퓨터인 「페인트 박스 HD(Paint Box HD)」로 그림을 그린다. 「페인트 박스(Paint Box)」로 말하자면 영국의 퀀텔사(Quantel)가 20년간의 기술축적으로 만들어낸 시각표현 전문 컴퓨터로서, 국내에는 아직 한 대도 없는 超高價의 컴퓨터 시스템이다. 유관호는 이 컴퓨터 시스템을 사용하기 위해 일년에 수차례씩 일본을 방문한다. 일본도 몇 대 보유하고 있지 않은 이 초용량, 초기능의 컴퓨터를 개인적 우정만으로 자유로이 사용할 수 llTek는 점에서 유관호는 어쩌면 행운아일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러한 행운은 컴퓨터 매체를 통해 새로운 시각혁명을 일으키겠다는 작가의 뜨거운 열정을 불러들인 것이며, 페인트 박스 역시 작가의 사랑과 열정에 확실한 응답을 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작가가 원하는 색과 질감의 완벽한 재현, 시원하게 큰 화면, 종이가 아닌 철판과 아크릴 판 위의 인쇄 등 기법상의 혁신만 해도 관심있는 사람들의 주의를 모으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컴퓨터를 어떠한 맥락으로 사용했는가와 결과물의 예술적 성취에 대한 판단일 것이다.

요사이 컴퓨터를 창조의 도구로 삼고자 하는 젊은 작가들이 많이 눈에 띈다. 퍼스널컴퓨터의 대중적 확산과 그래픽 기능의 괄목할 만한 발전은 현대인의 시지각 방식과 사고방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컴퓨터는 이전의 망원경이나 현미경과 같이 지각의 영역 뿐 아니라 삼라만상에 대한 우리의 전망을 확장시킨다. 미소회로에서부터 거시공학에 이르는 정보를 그림으로써 보여 주기도 하고, 입력된 정보들을 요구대로 처리하여 무한히 다양한 영상들의 모델을 제시해 주기도 한다. 또 엘렉트로닉 콜라쥬, 다이나믹스, 트랜스포메이션 등 외에 가상의 리얼리티 창조를 위한 컴퓨터 시뮬레이션, 클로즈업, 생략, 원근법으로 보기 등 다양한 기법을 통해 새로운 시각 환경을 제공해 준다. 그리고 뉴턴이나 아인슈타인이 알지 못했던 새로운 물리법칙에 의해 일상적 사물이나 함축적 사물들을 예기치 않은 환경으로 이동시켜 환상적 공간을 창조하기도 한다. 더욱 괄목할만한 컴퓨터 영상엔진의 기능은 이미지의 전개과정이 생물학적 과정과 유전학적 전개를 흉내내고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기하학인 프랙탈 이론을 반증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즉, 컴퓨터 환경 안에서 수학적 연계성의 단순한 스파크를 통해 색채와 윤곽과 형태의 공간상 패턴이 증식하는 방식은 마치 불이 번져나가듯 전자생태학을 방불케 하는 것이다.

이처럼 컴퓨터의 기능은 응용미술의 분야 뿐 아니라 순수미술의 분야에서도 주목을 받기에 충분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많은 실험적 작가들이 컴퓨터의 창조적 활용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 가능성을 탐구하고 있는 것 역시 미래의 시각세계를 지배할 총아로 컴퓨터가 떠오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하여 소위 테크놀로지 아트의 범주안에 컴퓨터 그래픽과 컴퓨터 애니메이션, 또는 컴퓨터 인스탈레이션이 자연스레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컴퓨터 미술이 진정한 예술로서 정착되는 데에는 많은 문제점이 도사리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고 있는 컴퓨터 기능에 예술가가 끊임없이 적응할 수 있는가하는 문제이다. 쓸모를 기준으로 제작되고 소비되는 무수한 컴퓨터 애디드 디자이닝(CAD : Computer-Aided Designing)과 구별되는 순수예술의 영역에서 컴퓨터는 예술적 영감을 실현시키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이다. 그런데 그 도구 자체가 급변하고 있는 상황에서 예술가는 자신의 세계를 전개시켜 갈 여유를 상실하게 된다. 자칫 빈곤한 예술철학을 감추기 위한 첨단 기법의 나열로 전락하거나, 낙후된 기술로 식상한 표현을 일삼아 대중의 외면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컴퓨터를 매체로 삼고자 하는 예술가는 두 마리의 토끼를 잡아야 하는 부담감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이런 의미에서 전통적 예술가보다 더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있다고 하겠다.

컴퓨터 미술의 또다른 문제점은 컴퓨터의 무한 복제기능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동일한 질의 작품을 무한대로 찍어낼 수 있을 뿐 아니라, 프로그래밍된 디스켓 자체의 무한 복제마저 가능한 상태에서 순수예술의 아우라는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더구나 저장된 프로그램의 일부를 수정하거나 순서를 바꿈으로써 교묘한 표절이 행해질 경우 이를 통제할 방법이 거의 전무하다. 이러한 딜레마를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일부의 작가들은 컴퓨터의 이러한 특성을 적극 수용하여 순수미술의 경계를 넓히는 방편으로 삼고자 하며, 일부의 작자들은 개념미술가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점을 방관하기도 한다. 그러나 또다른 작가들은 컴퓨터 미술을 기존의 순수미술영역에 고정시키기 위하여 프린트 아웃된 결과물에 전통 판화와 같은 작품 번호를 기입하거나 아예 공개적으로 디스켓을 파괴하기도 한다. 이처럼 컴퓨터 미술은 포스트모던시대의 난맥상에 하나의 가지를 더해 주며 총제적인 접근과 해석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유관호 역시 이와 같은 딜레마 속에서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페인트 박스」의 엄청난 능력 앞에 감탄하고, 그 조작법에 도전하며, 그 가능성을 탐구하는 데 5년을 투자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컴퓨터에 더 이상 종속되지 않으며 자신의 의지대로 컴퓨터를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컴퓨터, 특히 페인트 박스에 도전하기 이전부터 그의 관심을 붙잡아 왔던 것, 곧 예술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서 컴퓨터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그는 천부적 테너였지만 음악의 길을 포기해야 했고 순수예술에의 열정을 지녔지만 디자이너가 되어야 했다. 그러므로 ‘가지 않는 길’에 대한 끝없는 목마름, 뮤즈에의 환상은 그의 작업을 언제나 음악적 카테고리 안에 머물게 했다. 디자인 작업에서 훈련된 순수 색채와 현태에의 감각, 컴퓨터 매체에의 숙달로하여 그의 작업은 컴퓨터 미술가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 소양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칸딘스키(Kandinsky)가 쇤베르그(Schoenberg)로부터 미학적 동질성을 발견한 것 같이, 그 역시 페인트 박스에 의한 색채의 무한 지평확대를 쇤베르그의 12음계법 발상에 비견하고 있따. 화면 자체는 고정되어 있으나, 하나의 파장을 이루어지고 있는 빛으로서의 색채는 그 자체로 음악적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서예를 연상시키는 활달한 드로잉들의 결합을 그의 화면을 더욱 율동적이게 한다. 반 고호(Van Gogh)의 표현적 붓터치와 칸딘스키의 추상주의 , 클레(Klee)의 음악적 번안이 유관호의 미술사적 계보를 설명해 준다. 이에 금속재 위의 프린트, 화면 재배치, 기하학적 구조물의 첨가를 거치면서 그의 작업은 포스트모던 사회의 복합적 미학체계를 표출하게 된다.

그의 작업과정은 전체적 에스키스를 거쳐 부분 드로잉으로부터 시작된다. 흔히 오해하듯 無의 상태에서 컴퓨터로 바로 그림을 그려가는 것이 아니라 붓과 물감으로 여러장의 드로잉 작품을 만든 후에 이를 스캐닝 하여 합성하는 과정을 거친다. 드로잉의 모티브는 한국의 민화에서 주로 취하되 그 형태는 一筆揮之의 추상化과정을 거쳐 춤추는 듯한 선들의 합창으로 마무리 된다. 이렇게 하여 생성된 하나의 화면은 필림에 전사되어 스텐레스 스틸판 위에 프린트된 여러장의 화면은 다시 작가의 의도에 따라 재배치되고 그 위에 기하학적 형태의 스텐레스 스틸 구조물이 돌출되도록 첨가한다. 스텐레스 스틸 위의 컴퓨터 프린트 역시 특수 안료를 고열로써 철판위에 일순간에 압착시키는 최첨단의 공법이다. 이 과정에서 흔히 디지털 이미지의 고유성이자 한계로 인식되고 있는 망점이 사라진다. 색료가 망점을 통과하면서 고열에 의해 순간적으로 혼합되기 때문이다.

이제 유관호는 첨단의 과학을 전통적 순수예술의 장르와 성공적으로 접목시킨 파이오니어가 되었다. 그는 컴퓨터에 종속당하지 않았고, 견고한 미의식의 구현을 위해 컴퓨터를 정복했다. 그는 최첨단의 컴퓨터로 작업하지만 컴퓨터를 드러내기보단 자신을 드러낸다. 그는 음악에의 열정을 색채와 형태와 공간 속에 쏟아부으며 노래 부르듯이, 작곡을 하듯이 컴퓨터로 그림을 그린다. 그리고 수작업에 의한 최종 공정을 추가함으로써 무한복제의 가능성을 원천봉쇄하고 순수 미술의 아우라를 건져 올린다. 더구나 스텐레스 스틸 프레임의 추가로 나타나는 이 수작업은 컴퓨터 그래픽에 의한 표현주의적 추상의 화면에 기하학적 추상기호들을 결합시킨다는 측면에서 추상형식에 대한 그의 관심과 개방성을 대변해 준다. 이처럼 그는 첨단매체인 컴퓨터로 작업함에도 여전히 전통적 추상주의자의 범례 안에 머물러 있게 된다.

앞으로 그는 음악과 미술의 보다 직접적인 결합을 시도하기 원한다. 일종의 공연예술이 될 이 작업도 그의 애마 컴퓨터가 도와줄 것이다. 음악과 행위와 컴퓨터 애니메이션이 결합하는 全감각적 공간을 그가 어떻게 예술적으로 승화해낼지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예술적 소양이 부족한 엔지니어들의 컴퓨터 작업이 예술을 자처하고, 철학 부재의 모방이 빚어내는 뜻 모를 굉음을 컴퓨터 예술의 전부로 오해하는 천박한 풍토 속에서, 한 사람의 진지한 탐구와 일관성 있는 미의식의 전개는 혼미한 현대미술계의 가닥잡기에 작은 보탬이 되리라 생각한다.

김혜경 (갤러리 아트빔 큐레이터)